화려한 문화가 발전했던 무로마치 시대의 교토는 15세기 후반 거대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1467년 시작된 ‘오닌의 난’입니다. 오늘은 일본 전국시대의 문을 열게 된 오닌의 난은 왜 일어났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쇼군의 후계 문제와 유력 가문들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었지만, 수많은 무사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면서 전쟁은 약 11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교토는 큰 피해를 입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힘도 크게 약해졌습니다.
오닌의 난은 왜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이 어떻게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경쟁하는 전국시대로 이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쇼군은 누구? 후계 문제에 여러 가문의 싸움이 얽히다
오닌의 난이 일어날 무렵 무로마치 막부의 제8대 쇼군은 아시카가 요시마사였습니다. 요시마사는 정치보다는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은각으로 유명해진 건축물을 세웠으며 그의 시대에는 히가시야마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쇼군의 후계 문제였습니다. 요시마사에게 한동안 아들이 없자 그는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부인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낳으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이미 후계자로 거론된 동생과 새롭게 태어난 아들 가운데 누가 다음 쇼군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오닌의 난을 단순히 ‘형의 자리를 동생과 아들이 놓고 싸운 전쟁’이라고 이해하면 실제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막부 안의 여러 유력 가문에서도 각각 후계 문제와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강력한 슈고 다이묘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서로 대립했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단순한 적대관계만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혼인으로 연결된 관계였지만 여러 정치적인 문제에서 서로 다른 세력을 지지하면서 결국 경쟁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여기에 하타케야마씨와 시바씨 등 유력 가문 내부의 후계 분쟁까지 얽혔습니다. 어느 한 가문의 다툼이 다른 가문의 이해관계와 연결되고, 그 뒤에 또 다른 유력자가 가세하면서 갈등의 규모가 점점 커졌습니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강력한 다이묘들을 완전히 통제할 만큼 안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쇼군이 여러 세력의 다툼을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자 각 가문은 자신들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결국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중심으로 한 동군과 야마나 소젠을 중심으로 한 서군이 형성되었습니다. 수많은 무사가 교토로 모여들면서 정치적 갈등은 실제 전투로 번졌습니다.
1467년, 마침내 교토에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됩니다. 당시 연호가 ‘오닌’이었기 때문에 이 전쟁을 오닌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시작할 때만 해도 누구도 이 싸움이 약 11년 동안 이어지며 일본의 정치질서를 크게 흔들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수도 교토가 전쟁터로 변하다, 11년 동안 무엇이 벌어졌을까?
오닌의 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본의 정치와 문화 중심지였던 교토가 주요 전쟁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동군과 서군의 병력이 교토에 모여 서로 진영을 만들었고 도시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교토는 천황과 귀족들이 생활하고 막부가 자리 잡은 도시였습니다. 많은 사찰과 저택, 상점과 주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전투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도시의 상당 부분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막부의 권력관계가 결정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목적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수많은 세력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여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기 어려웠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전쟁의 중심인물이었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1473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쟁은 즉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가문과 지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아들 요시히사가 제9대 쇼군이 되었습니다. 후계 문제의 중요한 부분이 정리되었음에도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1477년 서군의 주요 세력이 교토에서 철수하면서 오닌의 난은 사실상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명확한 최종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이 남긴 결과가 더 중요했습니다. 교토는 크게 훼손되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도 약해졌습니다. 쇼군이 강력한 다이묘들의 갈등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지방의 다이묘들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교토에서 싸우는 동안 자신의 영지에서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기도 했고, 지방의 무사들이 기존의 주인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늘어났습니다.
중앙에서 모든 지역을 통제하는 힘이 약해지면 결국 각 지역에서는 ‘누가 실제로 힘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높은 신분이나 오래된 가문의 이름만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평화로운 이전의 질서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본 곳곳에서 새로운 권력 경쟁이 벌어지는 더 긴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아랫사람이 위를 뒤집는다? 하극상과 전국시대의 시작
오닌의 난 이후 일본 역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하극상’입니다. 한자로는 下剋上이라고 쓰며, 말 그대로 아래에 있던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을 누르고 권력을 차지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전체에서 부하들이 주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기존의 권력질서가 흔들리면서 실제 능력과 군사력을 가진 지방세력이 기존 지배자를 대신하는 사례가 늘어났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예전에는 쇼군이 슈고를 임명하고 슈고가 지방을 다스리는 질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서 직접 토지와 무사들을 장악한 세력이 더욱 강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영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성장한 유력 무사들을 흔히 ‘센고쿠 다이묘’, 즉 전국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자신의 지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독자적인 법을 만들기도 하고 성과 도시를 정비하며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전국 다이묘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농업 생산을 늘리고 시장과 교통을 관리하며 많은 무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시대는 끊임없이 전쟁만 벌어졌던 시기이면서 동시에 각 지역의 통치체제가 변화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호조 소운이 있습니다. 그는 간토 지역에서 세력을 넓히며 이후 후호조씨가 강력한 전국 다이묘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 밖에도 일본 각지에서 새로운 다이묘들이 등장하여 주변 세력과 경쟁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쇼군도 계속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지방의 다이묘들을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점점 약해졌고 일본의 정치질서는 여러 지역의 강력한 세력이 경쟁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이 시기를 우리는 흔히 ‘전국시대’라고 부릅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시대 구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오닌의 난은 전국시대가 본격화되는 중요한 계기로 자주 다뤄집니다.
그리고 수많은 다이묘가 경쟁하던 이 혼란 속에서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무장들이 등장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활약할 무대도 바로 이러한 전국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오닌의 난은 단순히 교토에서 벌어진 11년간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지방의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성장하면서 일본의 정치질서가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오닌의 난이 끝났지만 일본에는 안정된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토와 생존을 걸고 경쟁하는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수많은 다이묘가 싸웠던 일본 전국시대가 실제로 어떤 시대였는지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