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무로마치 막부와 아시카가 시대
두 차례의 몽골 원정을 막아낸 가마쿠라 막부는 겉으로는 강해 보였지만 내부에서는 점차 균열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가마쿠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로마치 막부와 아시카가 시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막부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약 140년간 이어진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무사정권이 등장합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입니다. 교토의 무로마치 지역에 자리 잡은 새로운 막부는 일본 정치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유명한 금각과 은각, 선종문화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문화의 뒤에서는 지방의 다이묘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시작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과정까지 살펴보겠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왜 무너졌을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등장
가마쿠라 막부는 13세기 후반 두 차례에 걸친 몽골 원정을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외부의 침략을 막아낸 승리는 오히려 막부에 새로운 고민을 남겼습니다. 일본 내부의 세력끼리 싸워 영토를 빼앗은 전쟁이었다면 승리한 뒤 얻은 땅을 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몽골군을 물리쳐도 새롭게 얻는 일본 내 영토는 없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무사들은 오랫동안 경비를 서고 무기와 말을 준비하며 많은 비용을 부담했습니다. 그럼에도 기대했던 만큼의 보상을 받기 어려웠고 막부에 불만을 품는 무사들이 늘어났습니다. 여기에 고케닌들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호조씨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한 정치구조에 대한 불만도 겹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등장합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의 권력을 없애고 천황을 중심으로 정치를 다시 이끌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막부가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막부를 위해 싸우던 일부 유력 무사들이 등을 돌리면서 상황이 크게 바뀝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였습니다. 다카우지는 원래 가마쿠라 막부 측에서 활동했던 유력 무사였지만 결국 막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또 다른 무장 닛타 요시사다도 가마쿠라를 공격했습니다. 결국 1333년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집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가 사라진 뒤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추진했습니다. 이를 ‘겐무 신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체제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무사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에게 충분한 보상과 정치적 지위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고다이고 천황과 갈등하게 됩니다. 결국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새로운 천황을 세웠고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이동하여 자신이 정통임을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는 교토의 북조와 요시노의 남조라는 두 조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남북조 시대’가 펼쳐집니다. 천황이 한 명만 존재하는 익숙한 모습과 달리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조정이 대립한 것입니다.
다카우지는 1338년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새로운 무사정권을 이끌게 됩니다. 이것이 무로마치 막부로 이어집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뒤 곧바로 안정된 새 시대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천황과 무사, 여러 지방세력이 다시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혼란 속에서 새로운 막부가 탄생한 것입니다.
왜 ‘무로마치 막부’라고 부를까?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막부의 전성기
새로운 막부는 아시카가씨가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시카가 막부’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무로마치 막부’라고 부를까요?
‘무로마치’는 교토에 있는 지역 이름입니다.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교토 무로마치에 화려한 저택을 마련하고 정치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동쪽의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했다면 무로마치 막부는 다시 교토를 중심으로 정치를 펼쳤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무로마치 막부를 대표하는 쇼군입니다. 1392년에는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남조와 북조가 통합되면서 약 60년간 이어진 남북조의 대립이 끝났습니다. 요시미쓰는 지방의 유력한 무사들을 통제하면서 쇼군의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방식은 가마쿠라 막부와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특히 지방에서는 ‘슈고 다이묘’라고 불리는 강력한 무사들이 성장했습니다. 원래 슈고는 지방의 군사와 치안 등을 담당하던 직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지역에서 토지와 무사들을 장악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따라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이들 유력한 슈고 다이묘와 관계를 맺고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며 정치를 해야 했습니다. 쇼군 한 사람이 전국의 모든 지역을 직접 통제하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요시미쓰는 외교와 무역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명나라가 세워져 있었고 일본과 명 사이에는 공식적인 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왜구와 정식 무역선을 구별하기 위해 증명서를 사용하는 ‘감합무역’도 실시되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경제적으로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도시와 정기시장이 성장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각 지역을 오가는 물자와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요시미쓰를 떠올릴 때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교토의 금각입니다. 오늘날 긴카쿠지의 상징으로 알려진 금빛 건물은 요시미쓰가 세운 별장의 일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화려한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요시미쓰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무로마치 막부 전체가 항상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강한 지방세력들을 통제해야 하는 구조적인 어려움은 계속 남아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쇼군의 힘이 약해지면 이러한 문제는 더욱 크게 드러나게 됩니다.
금각과 은각의 시대, 화려한 문화 뒤에서 막부는 왜 약해졌을까?
무로마치 시대는 정치적으로 복잡했지만 일본 문화사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귀족들의 전통적인 문화와 새롭게 성장한 무사문화, 선종의 영향 등이 서로 만나면서 독특한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를 흔히 ‘기타야마 문화’라고 합니다. 앞서 살펴본 금각이 이를 상징하는 건축물입니다. 귀족적인 화려함과 무사문화, 선종 등의 요소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시간이 지나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시대에는 ‘히가시야마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이를 대표하는 곳이 오늘날 교토의 긴카쿠지, 즉 은각으로 유명한 사찰입니다. 이름 때문에 금각처럼 건물 전체가 은으로 덮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은각은 은으로 덮인 건물이 아닙니다.
히가시야마 문화에서는 화려함과는 또 다른 차분하고 절제된 미의식이 발전했습니다. 선종의 영향을 받은 정원과 수묵화 등이 발달했고 차를 마시는 문화 역시 이후 일본의 다도문화로 발전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유명한 일본 전통 공연인 ‘노’도 무로마치 시대에 크게 발전했습니다. 간아미와 제아미 부자가 쇼군의 후원을 받으며 노를 예술적인 공연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문화는 발전했지만 정치 상황은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시카가 요시마사 시대에는 다음 쇼군 자리를 둘러싼 후계 문제와 유력 다이묘들 사이의 세력 다툼이 복잡하게 얽혔습니다.
결국 1467년 교토를 중심으로 대규모 전쟁이 시작됩니다. 바로 ‘오닌의 난’입니다. 처음에는 쇼군의 후계 문제와 유력 가문들의 갈등 등이 얽힌 싸움이었지만 여러 다이묘가 두 편으로 갈라져 참여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졌습니다.
전쟁은 약 11년 동안 이어졌고 교토의 많은 지역이 파괴되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막부가 이전과 같은 권위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지방에서는 자신의 영지를 직접 지배하는 무사들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기존의 주인을 밀어내고 아래에 있던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일도 나타났습니다. 이를 ‘하극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제 일본은 쇼군이 전국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시대에서 각 지역의 강력한 다이묘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로 점차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혼란 속에서 훗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등장할 무대가 만들어집니다.
무로마치 시대는 아시카가씨의 무사정권 아래 금각과 은각, 노와 선종문화가 발전한 동시에 지방 다이묘들의 힘이 커지며 막부의 지배력이 약해진 시대였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교토를 전쟁터로 만들고 일본을 전국시대로 밀어 넣는 중요한 계기가 된 오닌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쉽고 재미있게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