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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시대와 군국주의, 일본은 왜 더 큰 전쟁으로 향했을까?

양쿠미 2026. 9. 9. 14:05

메이지 시대에 빠른 근대화를 이루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20세기에 들어 국제적인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은 다이쇼 시대와 군국주의, 일본이 더 큰 전쟁으로 향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나고 다이쇼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 국내에서는 정당정치와 대중문화가 발달하는 새로운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은 중국 대륙에서 세력을 확대했고, 경제 불안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도 점점 강해졌습니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로 기억되는 다이쇼 시대의 일본은 어떻게 1930년대 군국주의와 전쟁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을까요?

다이쇼 시대와 군국주의, 일본은 왜 더 큰 전쟁으로 향했을까?
다이쇼 시대와 군국주의, 일본은 왜 더 큰 전쟁으로 향했을까?

정당정치와 카페가 등장한 다이쇼 시대, 일본 사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나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하면서 다이쇼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이쇼 시대는 1926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일본 역사 전체에서 보면 비교적 짧은 시기입니다. 하지만 정치와 사회, 문화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근대적인 제도 위에서 도시가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정치에 참여하려는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이러한 흐름을 흔히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릅니다.

 

1918년에는 하라 다카시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닌 중의원 의원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정당 내각을 구성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정당정치는 일본 정치에서 이전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선거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1925년 보통선거법이 만들어지면서 일정한 연령 이상의 남성에게 재산이나 납세액과 관계없이 선거권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아직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같은 해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정치 참여의 범위가 넓어지는 한편 정부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비롯하여 기존 국가체제에 도전한다고 판단한 사상과 운동을 통제하는 제도도 강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다이쇼 시대를 단순히 ‘일본에 민주주의가 완성된 시대’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정당정치와 시민 참여가 성장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움직임도 함께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도쿄와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는 전차와 백화점, 영화관과 카페 등이 등장했고 신문과 잡지 같은 대중매체도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서양식 옷을 입고 도시생활을 즐기는 젊은 여성들을 ‘모던 걸’, 젊은 남성들을 ‘모던 보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인 일본의 생활방식과 새로운 서양식 문화가 뒤섞이면서 독특한 도시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도시의 모습이 당시 일본인의 생활 전체를 대표했던 것은 아닙니다. 농촌에서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고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서민 사이에는 상당한 생활 격차가 존재했습니다.

 

또한 일본은 이미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타이완을 통치하는 제국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정당정치와 대중문화가 성장하던 시기에도 식민지에서는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계속되었습니다.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동대지진과 경제 불황, 일본 사회는 왜 점점 불안해졌을까?

다이쇼 시대 후반부터 일본 사회에는 여러 위기가 겹쳐 나타났습니다. 그중에서도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도쿄와 요코하마를 비롯한 간토 지역에 강한 지진이 발생했고 대규모 화재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집과 생활터전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재난 속에서 매우 비극적인 일도 벌어졌습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거나 방화를 한다는 등의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이 민간 자경단 등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중국인과 일본인 가운데에서도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관동대지진은 자연재해가 사회의 불안과 편견, 잘못된 정보와 결합하면 얼마나 심각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경제 상황도 좋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 국가들의 생산과 무역이 어려워진 틈을 이용하여 수출을 크게 늘렸고 경제적으로 호황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경기가 악화되면서 여러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1927년에는 금융공황이 발생하여 은행과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기에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영향까지 일본에 미쳤습니다.

 

특히 농촌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농가의 수입이 줄어들면서 생활이 힘들어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경제적인 불안은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정당 정치인들이 재벌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군부는 자신들이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고 국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여기에 일본의 산업과 인구를 유지하려면 해외의 자원과 시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습니다. 특히 중국의 만주는 석탄과 철을 비롯한 자원과 넓은 토지를 가진 지역으로 일본 군부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1931년 일본의 관동군은 만주에서 ‘만주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일본군은 남만주철도 일부가 폭파된 사건을 중국 측의 공격으로 돌리고 이를 구실로 군사행동을 확대했습니다. 이후 만주의 넓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1932년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겉으로는 독립국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강한 지배와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국제연맹은 조사 끝에 만주국을 일본이 주장한 방식의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국제사회와의 갈등을 더욱 키워갔습니다.

 

군부의 힘이 커지다, 일본은 어떻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향했을까?

1930년대 일본에서는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군인이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즉시 모든 정치가 사라졌다고 이해하면 당시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정당과 정부기관, 관료와 재계 등 기존의 세력도 계속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에 대한 암살과 군부 내부의 급진적인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정당정치는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1932년에는 해군 장교 등이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를 암살한 5·15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36년에는 일부 육군 청년 장교들이 병력을 이끌고 도쿄의 주요 시설을 점거하고 정치인들을 공격한 2·26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2·26 사건 자체는 진압되었지만 이후 군부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히려 더욱 커졌습니다.

그리고 1937년 베이징 근처의 루거우차오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적인 충돌이었지만 전투가 확대되면서 일본과 중국 사이의 전면적인 중일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군은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진격했고 같은 해 난징을 점령했습니다. 난징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수많은 중국 민간인과 포로가 살해되고 성폭력이 자행되는 등 대규모 잔혹행위가 발생했습니다. 오늘날 이를 난징대학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중국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일본은 점점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체결했습니다. 또한 중국과의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동남아시아의 자원에도 관심을 확대했습니다.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자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과의 갈등도 심해졌습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하는 등 경제적인 압박을 강화했습니다.

일본 정부와 미국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타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국 1941년 12월 일본군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일본은 동시에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여러 지역에서도 군사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과 영국 등을 상대로 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본격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쟁 초기 일본은 넓은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등을 거치며 일본은 큰 손실을 입었고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점차 일본 쪽으로 진격했습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군인뿐 아니라 일본과 식민지, 점령지역의 수많은 민간인까지 전쟁에 동원되고 희생되었습니다.

결국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동아시아와 태평양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산업력과 군사력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와 지역을 지배하고 전쟁을 확대하는 힘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다이쇼 시대에는 정당정치와 대중문화가 성장했지만, 경제위기와 사회적 불안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커졌고 일본의 대외팽창은 결국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거대한 전쟁은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후에는 패전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점령을 거치면서 일본이 어떻게 오늘날의 정치·사회체제를 갖추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