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점심시간에 작은 도시락 상자를 꺼내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도시락에도 문화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일본 벤토의 종류와 발달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기차역에서는 지역 특산물이 담긴 도시락을 판매하고, 봄철 벚꽃놀이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도시락을 펼쳐놓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도시락을 ‘벤토(弁当)’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밖에서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한 음식 같지만 일본의 벤토에는 오랜 역사와 지역의 음식문화, 보기 좋게 음식을 담는 방식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일본의 도시락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했을까요?

일본의 벤토는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을까?
음식을 가지고 이동해 밖에서 먹는 습관은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먼 길을 가거나 일을 하러 나갈 때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밥을 준비해 가지고 다녔습니다.
일본의 옛 휴대식 가운데는 쌀을 말린 ‘호시이’가 있었습니다. 물이나 뜨거운 물에 불려 먹거나 그대로 먹을 수 있어 여행이나 전쟁처럼 오랫동안 음식을 보관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용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벤토와 완전히 같은 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밖에서 먹을 식사를 휴대했다는 점에서는 벤토문화의 오랜 배경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밥과 반찬을 용기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형태가 발전했습니다. 특히 에도 시대에는 도시문화와 여행문화가 성장하면서 벤토를 즐기는 상황도 다양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벚꽃을 구경하는 하나미나 단풍놀이, 야외 나들이 등에 음식을 준비해 갔습니다. 여러 칸으로 나뉜 화려한 도시락 용기에 밥과 다양한 반찬을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기도 했습니다.
가부키와 같은 공연을 보면서 먹는 도시락도 발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유명한 ‘마쿠노우치 벤토’라는 이름은 공연의 막과 막 사이인 ‘마쿠노우치’와 관련되었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정확한 명칭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어 한 가지 이야기만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마쿠노우치 벤토는 일반적으로 밥과 생선, 달걀말이, 채소 등 여러 반찬을 조금씩 담은 도시락을 가리킵니다. 한 상의 일본식 식사를 작은 상자 안에 옮겨놓은 듯한 구성이 특징입니다.
메이지 시대에 철도가 확대되면서 벤토문화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기차를 이용해 장거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역에서 여행객에게 도시락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도시락이 바로 ‘에키벤(駅弁)’입니다. ‘에키’는 역, ‘벤’은 벤토를 줄인 표현으로 말 그대로 ‘역 도시락’이라는 뜻입니다.
일본 최초의 에키벤이 정확히 어디에서 판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1880년대 철도 발달과 함께 등장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 벤토는 집에서 싸가는 음식뿐 아니라 여행 중 구입해 먹는 음식으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기차역마다 도시락이 다르다? 여행의 재미가 된 에키벤
오늘날 일본에서 에키벤은 단순히 배가 고플 때 사 먹는 도시락을 넘어 철도여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지역마다 도시락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생선이나 해산물을 활용하고 산간지역에서는 고기나 산나물 등 지역에서 친숙한 재료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홋카이도의 일부 역에서는 게나 연어알 등 해산물을 활용한 도시락을 만날 수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쇠고기나 닭고기, 지역에서 유명한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에키벤을 판매합니다.
따라서 에키벤 하나에도 그 지역의 음식문화가 담길 수 있습니다. 여행자가 기차에서 도시락 상자를 열어보는 것만으로도 지나가는 지역의 특색을 경험할 수 있는 셈입니다.
포장에도 개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각형 도시락뿐 아니라 지역의 관광명소나 철도차량 등을 활용해 독특한 용기를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먹고 난 뒤 용기를 기념품처럼 보관할 수 있도록 제작한 제품도 있습니다.
스스로 음식을 데울 수 있는 도시락도 등장했습니다. 포장에 마련된 장치를 작동시키면 발열재의 작용으로 도시락이 따뜻해지는 방식입니다. 전자레인지가 없는 기차 안에서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아이디어입니다.
에키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꼭 해당 지역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백화점 등에서 전국의 유명 에키벤을 모아 판매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합니다. 각 지역의 도시락을 비교해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음식문화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모든 역에서 다양한 에키벤을 판매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작은 역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철도 이용방식과 유통환경이 달라지면서 과거처럼 역 승강장에서 직접 도시락을 파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진 곳도 있습니다.
신칸센이 정차하는 주요 역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는 역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에키벤을 만나기 쉽습니다. 여행 전에 어떤 도시락이 유명한지 찾아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처럼 철도와 벤토가 결합하면서 이동시간 자체가 여행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기차를 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그 지역의 도시락을 먹는 경험까지 여행에 포함된 것입니다.
문어 모양 소시지와 캐릭터 도시락, 왜 보기 좋게 꾸밀까?
일본의 벤토문화에서 빼놓기 어려운 것이 가정에서 만드는 도시락입니다. 학교나 직장에 가져갈 점심을 작은 도시락통에 담으면서 제한된 공간에 여러 음식을 알맞게 배치하는 방식이 발전했습니다.
일반적인 가정식 벤토에는 밥과 달걀말이, 생선이나 고기요리, 채소반찬 등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밥 위에 우메보시라고 하는 매실절임 하나를 올려놓는 모습도 오래전부터 익숙한 도시락 이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작은 소시지에 칼집을 내어 익히면 끝부분이 벌어지면서 문어처럼 보이는 ‘다코상 윈나’도 유명합니다. 작은 음식 하나를 조금 재미있게 꾸며 도시락 상자를 보기 좋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더욱 발전한 것이 ‘캬라벤’입니다. ‘캐릭터 벤토’를 줄여 부르는 말로 밥과 김, 달걀, 채소 등을 이용해 동물이나 만화 캐릭터처럼 꾸민 도시락을 말합니다.
밥으로 얼굴을 만들고 김을 잘라 눈과 입을 표현하는 식입니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면서 정교하게 만든 캬라벤 사진이 널리 공유되었고 일본 밖에서도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의 부모들이 매일 정교한 캐릭터 도시락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온라인에서는 화려한 도시락이 눈에 잘 띄지만 실제 가정의 도시락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훨씬 간단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냉동 반찬이나 미리 만들어 둔 음식을 활용해 도시락 준비시간을 줄이는 가정도 많습니다. 도시락을 직접 준비하지 않고 학교나 회사의 급식, 식당, 음식점 등을 이용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습니다.
벤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음식의 안전입니다. 도시락은 만든 직후 바로 먹지 않고 몇 시간 뒤에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상하는 재료를 피하고 충분히 식힌 뒤 뚜껑을 닫는 등 보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여름철에는 보냉제나 보냉가방을 사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보기 좋은 모양뿐 아니라 음식을 안전하게 가지고 다니기 위한 생활의 지혜도 함께 발전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벤토를 보면 작은 상자 안에서 색과 모양을 다양하게 배치하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밥과 주된 반찬만 넣기보다 노란 달걀, 초록색 채소, 붉은색 계열의 반찬처럼 서로 다른 색을 활용하면 작은 도시락도 풍성하게 보입니다.
결국 벤토는 거창한 전통음식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행길의 에키벤부터 학생의 점심 도시락, 직장인의 간단한 한 끼까지 일본인의 다양한 일상 속에서 발전해 온 식사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벤토는 밖에서 간편하게 식사를 하기 위한 휴대식에서 시작해 나들이와 공연, 철도여행과 학교생활 등 다양한 일상과 만나며 발전했습니다.
특히 지역의 맛을 담은 에키벤과 작은 상자를 보기 좋게 구성하는 가정식 벤토를 살펴보면 도시락 하나에도 시대와 생활방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여행에서 도시락을 만나게 된다면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작은 상자 안에 담긴 일본의 생활문화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